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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RAL REVIEW

도드람 2020-2021 V-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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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 처음으로 외국인 기장에게 조정대를 맡긴 대한항공. 우려 속 이륙이었지만 결과는 성공이었다.
 
코로나로 정규리그를 다 마치지 못한 2019-2020시즌, 2위에 그친 대한항공은 지난 4시즌 동안 팀을 이끈 ‘검증된 지도자’ 박기원 감독과 결별하며 변화의 시즌을 예고했다.
 
그 시작은 외국인 감독 영입이었다. 복수의 외국인 지도자들과 접촉하며 긍정적인 답변을 받은 대한항공이었지만 코로나 악재에 ‘산 넘어 산’이었다. 결국 1순위 후보였던 유명 감독이 코로나에 한국행을 포기했고 차순이었던 이탈리아 출신 로베르토 산틸리 감독의 계약이 급물살을 탔다.
 
이탈리아, 러시아, 독일 등 유럽 각국 리그에서 지휘봉을 잡은 산틸리였지만 아시아에서는 호주 남자대표팀 감독 경력이 전부였던 상황. 산틸리 감독도 대한항공도, 양쪽 모두 모험이자 도전이었다. 서로에게 보험이라도 들 듯, 계약기간 1년에 합의했고 남자부 사상 첫 외국인 감독의 V리그 입성이 확정됐다.
 
2주간의 자가격리를 마친 산틸리 감독이 대한항공에 합류한 것은 6월초. 대한항공과 계약한 이래 대한항공 선수 면면을 집중 분석했다는 산틸리 감독은 첫 훈련에서 선수들을 ‘좋은 수프’에 비유했다. “대한항공은 지금 좋은 수프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소스만 더 첨가하면 훨씬 좋아질 겁니다.”
 
대한항공의 변수로 꼽힌 외국인 사령탑, 산틸리 감독은 V리그 개막에 앞서 치러진 컵대회를 통해 베일을 벗었다. 재계약한 외국인 선수 안드레스 비예나 없이 치른 컵대회에서 산틸리 감독은 젊은피들을 적극 기용, 검증된 주전들로 안정적인 플레이를 추구하던 대한항공의 체질 개선을 예고했다. 
 
변화를 주도한 것은 프로 4년차 라이트 임동혁이었다. 비예나를 대신해 컵대회 5경기 전 세트에 출전해 잠재력을 폭발한 임동혁은 컵대회 활약을 발판 삼아 정규리그에서도 산틸리 감독의 신임을 받았다. 임동혁 뿐만이 아니었다. 귀화선수인 프로 2년차 센터 진지위와 역시 프로에서 두 번째 시즌을 맞는 리베로 오은열도 마찬가지. 편견 없는 외국인 감독의 부임은 익숙하지 않은 얼굴들의 활약을 이끌어냈다. 전문가들이 컵대회에서 준우승한 대한항공을 2020-2021시즌 ‘0순위 우승후보’로 꼽은 이유였다.
 
하지만 믿었던 외국인 라이트 비예나의 부상 악재는 순항할 것처럼 보이던 대한항공에 위기를 안겼다. 비시즌 스페인 대표팀에 선발된 비예나는 유럽선수권대회에 출전하느라 예정보다 늦게 입국했고 팀 합류 이후에도 좀처럼 컨디션을 끌어올리지 못했다. 시즌 시작 이후에도 무릎 통증을 호소하며 출장과 결장을 반복했고, 결국 11월28일 KB손해보험과의 경기를 끝으로 보따리를 쌌다.
 
대체용병은 요스바니였다. OK저축은행과 현대캐피탈에 뛴 V리그 경력자 요스바니를 긴급 호출했지만 코로나 시대, 팀 합류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됐다. 때문에 대한항공은 3라운드는 물론 4라운드 막판까지 외국인선수 없이 버텨야 했다. 팀 전력을 좌우하는 외국인선수의 공백을 메운 것은 컵대회 당시 비예나 대신 라이트로 활약한 임동혁이었다. 임동혁의 활약은 기록만 봐도 한 눈에 알 수 있다. 지난 시즌 대비 44세트가 더 많은 123세트에 출전했고 506득점을 올렸다. 프로 데뷔 이래 3시즌 동안 임동혁이 올린 득점은 111점. 이번 시즌 활약은 앞선 시즌들과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임동혁의 기대 이상의 활약이 큰 힘이 됐지만, 대한항공의 흔들림 없는 고공행진에는 국가대표 레프트 ‘석석 듀오’ 그리고 베테랑 세터 한선수의 기복 없는 활약이 있기에 가능했다. 특히 정지석은 절정의 활약으로 대한항공의 공격의 선봉에 섰다. 토종선수 중 가장 많은 득점(632점)을 올렸고 공격성공률(55.43%)은 외국인선수 포함 전체 1위였을 만큼 양질의 화력을 뽐냈다. 2013년 대한항공에서 데뷔한 정지석의 2020-2021시즌은 이견 없는, 데뷔 이래 최고의 활약이었다. 정규리그 MVP는 당연한 결과였다. 
 
정지석이 공격에서 압도적이었다면 곽승석은 수비에서 반짝반짝 빛났다. 대한항공이 치른 정규리그 36경기를 모두 뛴 곽승석은 디그 1위, 수비 2위라는 기록 그대로, 몸을 날리는 플레이로 대한항공 수비의 중심축이 됐다. 여기에 대한항공 공수 전력을 극대화한 국가대표 세터 한선수의 활약까지. 말 그대로 ‘좋은 수프’에 시스템을 리빌딩한 산틸리 감독이라는 ‘소스’가 더해지면서 대한항공은 시즌 막판까지 순위표 최상단에 자리할 수 있었다. 비교적 약하다는 평가를 받는 센터진에 외국인선수의 장기 결장이라는 악재에도 대한항공이 정규리그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힘이었다.
 
대한항공의 정규리그 1위 등극은 2018-2019시즌 이후 두 시즌 만이자 통산 4번째였다. 더욱이 대한항공은 요스바니가 팀에 녹아 든 정규리그 마지막 6라운드에서 전승을 거두며 챔피언결정전에 직행한 터라 사상 첫 통합우승에 힘이 실렸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대한항공은 챔프 1차전부터 크게 흔들렸다. 대한항공 답지 않게 무려 25개의 범실을 쏟아내며 우리카드에 한 세트도 가져오지 못한 채 맥없이 무릎을 꿇었다. 2차전 마저 패하며 벼랑 끝으로 몰린 대한항공. 정규리그 1위를 하고도 챔프전에서 번번이 무릎을 꿇었던 챔프전 잔혹사가 재현되는 듯 했다. 
 
5전3승제 챔프전에서 3차전을 가까스로 승리해 승부를 4차전까지 끌고는 갔지만 이미 분위기는 우리카드로 넘어간 상황. 기울었던 승부의 추에 균형을 맞춘 것은 공교롭게도 우리카드의 주포 알렉스였다. 4차전 직전 갑작스런 복통과 구토 증세를 느낀 알렉스는 1세트 잠시 코트에 나선 뒤 2세트부터 내리 벤치를 지켰다. 대한항공은 주공격수가 빠진 우리카드에 완승을 거두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리는데 성공했다. 5차전에서도 알렉스의 컨디션은 나아지지 않았고 기세가 오른 대한항공은 챔프 5차전 승리를 가져오며 창단 이래 첫 통합우승이라는 이정표를 세웠다. 
 
성공적인 시즌을 보낸 대한항공은 다시 변화의 시즌을 예고하고 있다. 통합우승의 주인공 산틸리 감독과 재계약하는 대신, 핀란드 출신의 젊은 감독과 사인했다. 토미 틸리카이넨 감독은 1987년생으로, 한선수 보다도 두 살 적은 만 34세다. 또 한번 파격적인 감독 영입으로 변화를 꾀한 대한항공은 국내 FA 최고 대우를 받으며 잔류한 ‘원클럽맨’ 한선수에, 건재한 토종 공격수들을 앞세워 2연패를 향한 이륙 준비를 마쳤다.
 
박지은(연합뉴스TV)